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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대문

안녕하십니까.

2008년 후반기 즈음에 이글루스로 '놀러' 온 기분으로 블로그를 만들어버린 비노라고 합니다.



이 블로그는, 개인 헛소리 지껄이거나, 개인이 쓴 허접한 소설이 올라옵니다.

혹은, 어떤 이상한 감상글이 올라오기도 하는 곳입니다.


뭐 그렇고 그런 장소랍니다.


그냥 눈살 찌푸리는 정도의 행위만 하지 않고, 대충 잘만 보낼 수 있도록 들어오는 분들께 일단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있을 링크신청은 이 글에 덧글을 달아주세요. 환영합니다.










ps. 저는 덧글이라던지 관심이라던지 그런 1g의 따듯함에 굶주려 있습니다. 자선을...(..)
ps2. 어쩐지 이상하다 싶으면, 참고해주세요. 제 그래픽카드와 모니터가 너무 구식이라 1024*768까지밖에 구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것이 기준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기타 잡 내용

by 비노 | 2010/12/31 02:23 | 일상-잡담류 | 트랙백 | 덧글(6)

2024; Prestissimo

“예! 독자 분들이 문학을 애인삼아 살아가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아침의 문학, ---의 셈프레입니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군요. 여러분의 아침은 문학과 함께 시작되셨는지요? 자, 열차를 타고 출근하고 계시는 당신! 당신의 손에는 이북(E-book)이 들려있습니까?”

셈프레가 빠르게 말했다. 래퍼를 해도 될 거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그가 하는 말이었기에, 모르는 사람에게 셈프레가 아주 빠르다고 말해줘도 그가 하는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듣고 보면 너무 빠르다. 그것도 이름처럼 항상 빠르다. 방금 한 말도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지나가버렸다. 그가 인터뷰를 하면 자막까지 달리곤 했으며, 생방송에서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자막의 입력속도가 따라갈 수 없이게 녹화방송에만 나왔다. 그렇게 따라붙은 반쪽짜리 방송인이라는 별칭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셈프레의 반쪽은 자막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셈프레의 말솜씨는 시청자가 바라는 것을 꼭 집어내기 때문에, 자막에만 집중하는 시청자들은 말이 너무 빨라도 별로 불평하지 않는다.

셈프레가 앤슨에게 인사를 했다. 빠르게 허리를 굽히고 펴더니 다시 속사포처럼 말을 건다. 앤슨은 자신의 인사가 끊겼음에도 느긋하게 쳐다만 보고 있다. 단지 인사치레에 불과한 말들은 자막도 무성의하게 주어진다.

“예, 오늘 ---에서는 앤슨 씨를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작가분이 쓰신 소설을 읽었습니다. 올해 3월 28일(대략 한 달 전입니다만), 한 문학창작 커뮤니티에 앤슨 씨께서 올리신 글입니다. 저는 이 소설에 대해서 앤슨 씨에게 질문을 하려 합니다. 시청자분들이 올려주신 질문과 저희 팀이 꼭 하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일단 첫 번째 질문입니다. 평소 팬이었던…….”

잠시 TV를 멈추고 단말접속기를 통해 서버에 들어간다. 유명한 작가이기에 어떤 포털사이트에 가도 인기검색어로 그의 이름이 뜬다. 그의 최신 글을 선택한다. 눈앞에 그의 글이 펼쳐진다.

 

 

 

글의 제목: 큰 음표들의 세상

작성일시: 2024년 3월 28일 13시 42분

작성자: Anson Comodo

본문:

딱! 하고 맞는 소리가 하나. 이제야 허리를 꼿꼿이 펴고 2로서 설 수가 있었는데, 다시 둥그렇게 말려 들어갈 것 같다. 그럴 것 같이 아프다. 왜 그래요.

“이런 때일수록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서두른다고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조금만 자신을 차분히 하세요.”

그녀의 입에서 잔 음색이 넘쳐흐른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녀석들이 나를 보더니 비웃는다. 이런 음색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비웃는다. 그 잘난 몸뚱이에 달린 점 하나를 떼더니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나보고 봐달라는 건가. 제길. 머리에 단 리본을 바람에 맞춰 살랑살랑 잡아당기고 늘어뜨린다. 느릿느릿 춤추며 여유롭게 날아가더니,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 동안, 나는 잔 음색만 계속해서 들으며 비웃음을 사버렸어.

“그나저나 저기요, 저 빠르게 춤추고 싶어서 여기에 배우러 왔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불편한 듯이 허리를 숙이고선 움직이지 않는다.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며 피아노 위에 앉는다.

“셈프레(Sempre)씨? 그런 마음가짐으로 도대체 어떤 음색을 춤출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기 날아가는 음표 분들이 다들 당신처럼 게으르게 있다가 춤을 출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면, 온음표부터 다시 배우고 오세요. 저분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저분들은 오랜 세월 현의 위에서 피가 마르도록 훈련을 해서 저렇게 세상에 음색을 나타내기 위한 춤을 출 수 있는 것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고작 10초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연주자가 와서 당신을 바라며 연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저를 놀리기 위해 온 것이라면…….”

셈프레라 불린 이분음표는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이 화가 나자 잠시 당황한다. 하지만, 이내 능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변명한다.

“아뇨 아뇨, 친애하는 마르카토(Marcato) 여사, 저는 당신을 능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여성분을 놀리기 위해 여기 올 정도로 시간이 넘쳐나지는 않거든요. 아, 그렇다고 이곳에서 연습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곳은 분명 환상적인 곳이지요. 당신 같이 아름다운 음색을 가진 선생님께 이번 같은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가르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음표들이 선망하는 당신이기에 이렇게 앞에서 열심히 면학에 힘쓰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제가 여기서 공부한지 꽤나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저기 날아가는 팔분, 십육분음표들이 저를 놀리고 재빨리 달아나는 모습을 보면, 그 어느 참을성이 많은 음표라고 해도 당장에 날아가고 싶은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하루가 바빠서 빨리빨리 날아가고 싶은 제가 참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빠르게 춤출 수가 없으니, 아무리 유명한 마르카토 여사라고 해도 신용이 깎여 내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입이 내가 춤춘 것 보다 더 빠르군요? 저도 하루빨리 빠른 춤을 추고 싶습니다. 저기 날아가는 우매한 팔분음표들을 재빨리 앞질러서 누구보다 빠른 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빨리 춤을 추지 않으면 저들이 멀리 날아가 버려서, 저는 비웃음만 산 채 보복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마르카토 씨는 한숨을 쉰다. 자기 앞에 있는 이 바보 같은 음표는, 그보다 앞선 어느 제자보다도 멍청한 것 같다. 열의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열의에 모든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것 같다. 본능만을 쫓는 동물처럼, 이 음표는 빠르기만 추구하고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건반 위를 떠나며 춤추고 싶어 한다. 선생에게 가르침을 얻어서 춤추고 싶어 한다. 하지만, 충고를 하면 변명만 뇌까리다가 다시 빨리 춤추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머리를 때려도 같은 말만 반복한다. 이런 바보 같은 반복을 고칠 기색은 죽어도 보이지 않는다.

맘만 먹고 꾸준한 연습만 하면 빠른 건반위에서 하늘을 향해 춤을 추며 수를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손에게 자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음악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재능을 받았기 때문인지, 저렇게 놀면서도 어느 정도의 춤은 출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느린 춤도 제대로 추지 못하면서 빠른 춤을 추려하다가 다른 음표들의 리본만 제대로 꼬아놓고 도망쳐 돌아오곤 한다.

그래도 춤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는 것만은 칭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칭찬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는 뻔하다. 칭찬하면 저 이분음표는 흥분해서 날뛸 것이다. 경험자가 하는 말이니 절대적으로 신용해도 좋다.

“자, 그런 듣지도 않는 변명 따윈 그만두세요. 저기 가서 안단테(Andante)부터 제대로 추고 오세요. 저기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손이 보이지 않나요? 당신에게 춤을 연습시키기 위해 피아노를 찾아온 것 같은 아름다운 손가락이군요. 자, 당신을 부릅니다. 어서 가서 춤추고 오세요. 가서 당신에게 맞는 느린 곡부터 연습하세요. 이렇게 꾸준히 연습하면 당신은 분명히 대단히 빠른 춤을 출 수 있게 될 것이에요.”

이렇게 달콤한 말로 연습을 하게 하면, 적어도 두 곡 정도는 연습을 할 것이다. 방금 불평을 했던 참이니, 세 곡을 하고 올 지도 모르겠다. 당장 겪은 일에 대해선 배움이 빠른 음표니까.

마르카토 씨는, 셈프레가 행여 불협화음이라도 내고 쫓겨날까봐 옆에서 지켜본다. 그러다가 다른 제자(이 음표는 팔분음표이다. 십육분음표가 된 후 춤을 추고 싶다고 해서 오랜 세월 정성을 다해 길러내고 있기도 하다)가 와서 그를 지도하다보니 셈프레가 세 곡을 다 끝냈다. 네 번째 곡이 시작하려고 하자, 어디선가 궁시렁거리는 음표가 있는 것 같아 무시한다.

네 번째 곡이 끝나기 직전에 팔분음표 제자가 인사를 하곤 바이올린을 켜는 녀석의 곁으로 돌아간다. 네 번째 곡이 끝나고, 하늘로 날아가며 고전파 음악을 꾸미던 녀석이 방벽에 부딪혀 꽤나 아름다운 음색을 울려 퍼뜨리곤 돌아온다.

“마르카토 여사, 이번 녀석은 피아노를 시작한지 어느 정도 된 연주자 같았습니다. 처음엔 느린 곡을 쳐서 저에게 고통만 줬었습니다만, 자신도 즐기기 시작했는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수준에서 그럭저럭 출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았습니다. 보셨나요? 저는 마르카토 여사가 연습시키던 춤보다 빠른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연습만 하면 육십사분음표로만 도배된 곡을 혼자서 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는 게, 점점 자신이 붙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자 자, 알겠어요. 역시 빠르게 춤을 추고 싶은 거겠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지요? 좋아요. 드디어 알아주었다니 고맙군요. 그럼 당장에라도 다음으로 넘어가죠. 여태 연습하던 것보다는 빠르게 춤을 추며 연습할 수 있게 해드리죠. 자, 따라오세요. 조금이라도 더 빠른 춤을 보여드릴 테니, 춤의 음색 잘 기억해두세요.”

셈프레가 언제나처럼 칭얼대는 한마디 한마디를 지껄일 기세를 보이자, 마르카토 씨는 일단 그의 말을 끊는다. 언제나처럼 누구보다 빠른 말을 추구하기에, 끊을 곳이 보이지 않았기에 짜증이 쌓이기 시작하자마자 끊어버린다. 그리고 해버릴 말만 계속 해버린다. 역시나, 하던 말이 끊긴 셈프레는 자신의 긴 목을 잔뜩 구부린 채 불만을 표출한다. 온음표부터 차근차근 자라나 이분음표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덜 성숙한 목에 힘이 없어 파르르 떨리지만, 마르카토 씨는 무시한다. 셈프레의 불만을 하나하나 끊지 않고 들어주다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악곡을 세 번 연주해도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르카토 여사, 질문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 음표들은 저보다 늙어 보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성과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여태 마지막 춤을 추지 않았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런 아름다운 육십사분의 몸을 가지고 썩혀둘 것이라면, 차라리 저에게 기뻐하며 양도할 일이지, 어찌 악보를 아름답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마르카토 씨는 셈프레를 가르치기 위한 곳으로 데려가던 중, 이러한 셈프레의 질문을 들었다. 셈프레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보자, 몇몇 아름다운 음표가 보였다. 한가하게 춤추며 담소를 나누는 그 음표들은 육십사분음표들이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들도 나름대로 행복해 보입니다. 그뿐이지만요. 마지막 춤의 그 희열을 어찌하여 미루는 걸까요?”

마르카토 씨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셈프레는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가 물었다. 그러고는 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돌아오며 외쳤다.

“저런 쓰레기 같은 음표들을 볼 순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악보와 음표, 감상자와 연주자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당장 저 리본을 갈아치우고 싶군요. 맙소사, 저들은 저렇게 한가로이 놀며 최후를 맞이하지 않은 채, 단지 인간들의 것들을 지켜보며 떠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쉼표 같은 녀석입니다!”

마르카토 씨는 셈프레에게 진정하라고 말하며 자신이 가려던 곳을 향해 그를 이끌었다.

 

“자, 셈프레 씨. 듣고는 있나요? 저기 걸어가는 인간이 보일 거예요. 예, 그 연주자보다는 다소 투박한 손을 갖고 있긴 하지요. 하지만 저 손으로 당신을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니 상관은 없어요. 저 사람의 발걸음이 낳는 소리들에서 나오는 이분, 사분음표들이 보이죠? 예, 당신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음표들일 거예요. 예? 아뇨, 저들은 아직 마지막 춤을 추지 않아요. 저 인간의 발이 지나가며 음색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은 연주자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니까요. 가끔 저런 곳에서 최후의 춤을 추며 날아가는 음표도 있지만, 저는 그런 셈프레 씨를 그렇게 만들려고 여기 데려온 것이 아니랍니다.

자,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기엔 당신과 같은 음표들이 많아요. 예? 아, 맞아요. 여기서도 당신은 연습을 할 뿐이에요. 당신이 나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열심히 말했었죠?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빠른 춤을 추기 위해서는, 그 목조차 꺾일 정도로 노력을 해야 해요. 하지만, 그것은 비단 연주자의 손끝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연주자가 낳는 음색은 정교해요. 그리고 그 반듯한 짜임은 너무나 아름다워, 감상자들을 시원하게 녹일 정도로 아름답죠. 당신은 여러 번 봤을 거예요. 당신을 비웃으며 날아가는 팔분, 십육분음표들이 그들 각각만의 춤을 추는 것이 아닌 것도 알 거예요. 여럿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도 알 것이에요. 연주자가 아름다운 음색을 감상자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화음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예? 혼자서 모든 음을 추겠다고요? 당신이 아무리 빠르게 춤을 출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해요. 결국 다른 음표들과 함께 춤을 추어야 해요. 예, 무리를 지어서.”

“오 맙소사.”

마르카토 씨가 또 자신에게 연습을 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셈프레는 실망한 것 같다. 거기다, 이번엔 잘 짜인 음악을 추는 것이 아니다. 아까의 분노는 벌써 식어버린 모양이다. 이미 허탈한 한숨마저 자연스럽게 지어낸다.

셈프레가 당연히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마르카토 씨는 하던 말을 계속 한다.

“셈프레 씨, 그렇게 연습이 싫나요? 하지만 별 수 없어요. 당신은 초등연주자가 뿜어내는, 매우 느린 악보조차 따라가지 못해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이분음표에겐 당연한 것이니 그리 실망치는 마세요. 당신이 무리를 짓고 춤을 추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에요. 연주자는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화음조차 없는 초등연주자의 악보도 못 따라가는 당신이, 숙련된 팔분음표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요?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맞물려 춤을 출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걸어가는 발걸음이 악보를 낳는 게 보이죠? 너무 거슬리죠? 저 불편한 꼬마음표들이 너무 미숙해서 꼴불견이죠? 하지만, 당신도 저들과 같은 수준의 춤밖에 출 수 없답니다. 그건 인정해야 해요. 당신이 빠르게 춤추려다 실패할 때마다 느낀 것이기도 해요. 이제, 그것을 극복해야죠? 당신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따라가며 그 발걸음의 찌그러진 악보를 따라 춤을 추는 거예요. 그 어지러운 악보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는 갓 자라난 등이 굽어버릴 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힘들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도를 높여 훈련하면, 당신이 바라는 만큼은 빠르게 마지막 춤을 추는 그날까지 이를 수는 없어도, 꽤나 빠른 시일 내에 숙달할 수 있어요. 당신이 매일같이 동경하던 육십사분음표도 무리는 아니에요. 연습이라고 해서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싫어하지도 마세요. 결국 이것은 필요한 길이에요. 천천히 성장해도, 당신은 참고 노력하는 것만 배우면 어느새 당신이 바라는 빠른 춤을 출 수 있을 거예요. 기억해요. 당신은 좋은 재능을 가진 음표랍니다.”

이렇게 달게 속여내면 노력한다. 저번과 같이 얼마 버티진 못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노력시키면 반드시 십육분음표까진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 목표가 높기에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셈프레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쾌활하게 춤을 추러간다. 마르카토 씨는 어지러이 움직이는 발들 속에서 힘겹게 춤추는 셈프레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에 다른 음표가 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 마르카토 여사. 이런 곳에서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용한 목소리가 퍼졌다.

 

“셈프레 씨, 열심히 춤추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 모습을 보니, 곧 당신의 배도 꽉 채워 사분음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호, 그렇다고 당신이 거기서 멈출 것이란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분명 빠른 춤을 출 수 있을 거예요.”

마르카토 씨는 말했다.

“오오, 맙소사. 마르카토 여사, 이것은 너무 고된 일입니다. 혹시 저를 증오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어떤 의심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음표를 고문하는 방법으로는 정말 탁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르카토 여사가 말씀하신 찌그러진 악보는, 최악이었습니다. 이것에 규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음표들끼리 어울려 춤을 추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춤을 췄지만, 이 연주에는 감상이 없어 보람차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간 제가 빠른 춤을 추기 전에 바람에 흩날려버릴 것 같습니다. 허리가 산산조각나기에는 충분한 고통이었으니까요.”

셈프레는 장황하게 말했다. 그리고 마르카토 씨의 옆에 낯선 음표가 서 있음을 발견한다.

“아, 에스프레시보(espressivo), 처음 뵙는 음표시군요. 저는 셈프레라 합니다. 실례지만,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셈프레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직 푸들푸들 떨리고 있다. 꽤나 무리를 한 모양이다.

“반갑습니다, 셈프레 씨. 좋은 이름이군요. 인간들이 걸어 다니는 사이에서 당신이 추시는 춤, 잘 봤습니다. 아직 연습단계시지만, 분명 당신이 바라시는 빠른 춤을 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트란퀼로 운 포코(Tranquillo un Poco)라고 합니다. 트란퀼로로 부르셔도 좋고, 포코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오, 트란퀼로 씨. 당신은 참 졸린 이름을 가지셨군요!”

트란퀼로 씨가 말하자 셈프레는 비웃듯이 말했다.

“예, 만들어지면서부터 저는 이런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여기 계시는 마르카토 여사와 거의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만, 부끄럽게도 아직 팔분음표입니다. 하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저렇게 발악하면서까지 성장하려 하는 음표들의 말로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알게 된 후 저는 느리지만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되돌아가는 일은 없더군요.”

트란퀼로 씨는 점잖게 말했다. 트란퀼로 씨가 온화하게 웃으며 마르카토 씨를 바라보자, 마르카토 씨는 어째선지 시선을 피한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셈프레가 자신을 대놓고 비웃고 있었으나, 트란퀼로 씨는 아직 어린 음표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런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트란퀼로 씨는, 자신도 저런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흥, 그래봤자 결국 남에게 뒤처지는 삶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자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모르시나 봅니다. 연주자가 흔드는 현 위에서 날아오르며 춤추는 음표들은 모두 빠른 몸놀림과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연주자를 만족시킬 수 있고, 연주자를 만족시킨 그 춤사위는 감상자들에게 환상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음표에게 그것만큼 황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성대연주자들 역시 같습니다. 북과 장구, 드럼 등을 두드린다던 연주자들도 같습니다. 이 모든 연주자들과 감상자들. 그들은 빠른 삶에 맞춰서 빠른 템포의 악보를 원합니다. 빠른 음색을 원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되겠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것을 바랍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황홀하니까요. 그것은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란 음표를 불태워가며 춤추게 할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모르시나봅니다. 당신은 음표 같지 않은 음표로군요. 일하지 않는 음표는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셈프레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트란퀼로 씨의 태평한 태도는 자신의 가치관과 정반대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라면 트란퀼로 씨만큼의 인생을 살았다면 적어도 십육분음표는 되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니, 분명 삽십이분음표는 되었을 것이다.

“글쎄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허리를 고되게 하면서까지 크고 싶지는 않았답니다. 저는 그런 고통까지 참아가며 마지막 춤을 추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교외에서 연주하는 악사들이 떠나보낸 음표들이 마지막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아직 사분음표이던 그때의 저는 그들을 보며 전율을 느꼈지요. 그건 당신이 보는 것만큼 황홀한 일일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가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늘 끝까지 악보를 따라 계속해서 춤을 출 것 같았었으니까요. 힘들면서도 엄청나게 보람차다는 대답을 원하며 따라갔습니다.

예, 당신이 원하던 대답을 얻었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지요.”

트란퀼로 씨는 차분차분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셈프레는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는 듯 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틀어댄다. 트란퀼로 씨의 느릿느릿한 어조는 셈프레에게 충분한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따라갔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악보 속에는 수많은 음표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음표들이 춤추고 있는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을 따라가기 바빴지만, 저는 저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끊임없이 질문했지요.

‘마지막 춤을 추는 당신은, 지금 어느 정도 행복하십니까?’ 노력가로 보이는 음표에게 질문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사람들이 연주하는 곳(수년 전에 신축된 콘서트홀이다. 보통 시끄럽고 신나는 음악을 하는 밴드가 무대에 오른다.)이 보이십니까? 저곳에서 열광하는 감상자들이 보일 겁니다. 그들 중 가장 기뻐하는 자보다 제가 백만 배 행복할 겁니다. 음표들이 관련되지 않은 어떤 곳의 인간들보다도 저는 행복합니다. 가장 경쟁이 심한 경기의 우승을 쟁취한 사람보다 일억 배는 더 행복할 겁니다. 부부가 된 첫 날의 밤의 뜨거운 열정을 나누는 그 둘의 쾌감을 합쳐도 제 끓어오르는 피에 비하면 태양 앞의 빙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춤춘 후 잠시 쉬는 동안 절정부터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욕망이라 비웃을 수도 있는 이런 감정은 춤을 확실히 즐긴 후 제 속에서 기어 나온 현자가 봐도 즐거워했습니다. 끝없이 기뻐지기에 죽은 후에도 기쁨은 계속해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런, 빨리 따라가야겠습니다. 저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 우주의 끝까지 악보를 따라가야겠지요.’

그는 너무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웃음이 피어나는 것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분명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더니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남들보다 빠르게 나가려던 그들은 점점 악보를 어기면서까지 앞서나가려 했고…….”

트란퀼로 씨는 말을 끊었다. 마르카토 씨가 너무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이다.

“아, 죄송합니다, 마르카토 여사. 저 같은 변절자가 이 이상 말하는 것은 앞으로 훌륭한 음악을 자아내야하는 음표들에게 있어선 머리의 리본을 당장 뜯어버리라는 명령과도 같겠죠. 너무 무례하게 굴었었군요. 셈프레 씨.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당신의 가치관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 하기로 합시다.”

트란퀼로 씨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마르카토 씨에게 먼저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그러고는 셈프레에게 나중에 기회가 닿길 바란다는 한마디를 전하고는 천천히 떠나갔다.

“휴, 마르카토 여사. 저 음표는 너무 조용합니다. 느려 터졌어요! 인간들의 상자가 보여주던 가장 느린 동물만큼이나 답답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음표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까!”

셈프레는 투덜대더니 다시 춤을 추러 갔다.

 

마르카토 씨가 트란퀼로 씨를 계속해서 노려본 이유는 간단하다. 경고하기 위해서다. 물론, 트란퀼로 씨가 자신의 제자를 망쳐도 자신에게 피해가 오진 않는다. 음표들은 인간들과는 다르게 돈이나 재물 같은 사유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트란퀼로 씨가 셈프레의 의욕을 그 조용한 어조로 산산조각 내버린다면, 셈프레는 당연히 트란퀼로 씨 같은 음표가 될 것이다. 즉, 다른 음표처럼 세상에 공헌할 기회조차 버려버린 음표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음표는 당연하게 춤을 춰야 했다. 그것이 느린 춤이든 빠른 춤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 마지막 춤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널리 알리지 않으면, 그 음표는 자신보다 어린 음표들에게 비웃음만 사게 될 것이다.

인간들의 예를 들어보자. 저 곳의 어린 인간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마치 마르카토 씨가 셈프레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셈프레와 같아, 성공하는 것을 바란다. 그 성공이란 것은, 인간들에게 있어선 돈을 많이 버는 일 같다. 음표에게 있어 성공하는 것은 성공적인 ‘마지막 춤’을 추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카토 씨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다. 마르카토 씨가 마지막 춤을 추고 난 후에 자신의 뒤를 이을 음표들은, 점차 빠른 춤만을 원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을 두려울 정도로 상대를 자신과 견주며 자신을 닦달한다. 그 자신이 마지막 춤 외에도 삶을 즐길 수단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빠르게, 빠르게 춤추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손들에게도 빠른 춤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음표들을 고생하게만 하는 이 악순환의 고리는 마르카토 씨와 같은 개개 음표의 노력으로 충분히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기에 가속하여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음표들의 세상을 막을 수 없었다.

트란퀼로 씨는 그 두 음표에게서 멀어지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셈프레에겐 이미 여유가 없었다. 마르카토 씨는 잠시 쉬자고 셈프레에게 권유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다고 성질을 부리며 다시 연습을 시작한다. 마르카토 씨도 셈프레의 열정에 마음을 굽혔는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지 않는다. 음표가 저 정도 움직이면 곧 쓰러질 것 같기도 하지만, 셈프레는 지치지 않는 것처럼 움직인다.

트란퀼로 씨는 불쌍하다는 듯이 점을 끌끌 차며 다시 뒤돌아본다. 이 세계엔 두 세상이 있었다. 두 세상은 서로 어울리며 공존했다. 하지만, 빠르게 치고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한 세상은 폭주하다 멈추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거의 없애 버렸다. 그리고 지금, 작은 세상으로서 그나마 존재하던 세상은 약자이기 때문에 힘을 쓰지 못했고, 큰 세상의 경멸을 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외로이 죽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세계에서 느린 것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 이 세계나, 이 세계나. 악보나 사람이나.

제길, 생각해보면 나도 죽어있는 사람이다. 나는 지옥의 최저 층까지 파묻혀버린 것일까. 어느 곳을 보아도 답답하며 고통스럽고, 위에서는 쾌활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과거가 그립다. 한 삼백 년쯤 전으로 날 보내줘. 되도록 동양으로 말이지. 저 셈프레 녀석들과 멀어질 수 있게 해줘.

 

 

 

 

글은 여기서 끝이 났다.

한 번 빠르게 읽었기에 깊은 평을 내리긴 어렵지만, 간단히 평을 내리자면…….

이번 소설은 그가 여태까지 쓰던 소설과는 너무 다르다. 현실사회의 신속한 소통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삶의 모습과, 미래의 화려한 모험담이 그가 쓰던 소설이었다. 이번 것은, 뭐랄까, 읽다보니 내가 욕을 먹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도 음표일 뿐이지 정말 인간적인 모습인데도 뭐랄까, 은근히 비꼬아진 느낌이다. 마르카토 여사가 셈프레가 아닌 나를 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 방송인 셈프레를 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소설이 급변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여태까지 내가 사랑하던 소설가라고 생각하기엔 낯설었다. TV를 재생시킨다. 멈춰있던 화면 속의 셈프레가 생기를 되찾아 빠르게 움직인다.

“……던 독자(아이디로는 아지타토(Agitato)십니다)분께서 하시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질문인데요, 이번 소설의 끝에선 작가분이 자신의 처지에 탄식하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끝에 가면서 주인공과 반대되는 입장의 등장인물에게 소설의 화자가 공감하는 것 같아 이런 반응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만?”

화면이 앤슨에게 옮겨진다.

“일단, 작가한테 자신의 소설을 해석해달라는 질문이 처음이라 많이 아쉽습니다. 음…….”

앤슨은 천천히 말하다 잠시 한숨을 내쉰다.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글을 쓴 앤슨이 아닌, 저 부분을 ‘공감했다’고 생각하는 독자 분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그 부분은 작가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에 일반적이겠지요. 그것을 통해서 뭘 말하고 싶었냐고 물으신다면, 비평가들이 빠르게 써 올릴 비평문들을 인터넷을 통해 읽어보시면 될 거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했던 의도로 해석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앤슨은 또박또박 말했다. 셈프레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예, 비평가분들이 쓸 글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지타토님의 질문은 해결 되셨는지 궁금하군요. 방송국 게시판에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다음 질문 입니…….”

나는 TV를 중지시켰다. 빠르게 지껄이는 셈프레를 무시해버린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늘따라 그의 빠른 주둥이가 너무도 밉다. 그놈의 주둥이가 나불대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입을 열고 멈춰버린 셈프레를 보고 가볍게 혀를 찬다.

지금의 앤슨은 예전까지 봤던 그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말투부터가 다른 것 같다.예전의 그는, 대기업의 충실한 회사원인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일처리가 신속한, 연산속도가 뛰어난 컴퓨터 같았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이던 주인공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는 행동에 있어 신속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혼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인터뷰의 시작에서, 셈프레의 속사포 같은 인사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벌써 다섯 번 이상 동일인물에게 인터뷰를 받는 것일 텐데도. 셈프레의 빠른 말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처럼 앤슨이 말을 더듬은 것은 아니었다. 앤슨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인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셈프레가 미워진 이유는 앤슨의 여유가 전염되어서일까. 그렇다면 조금 위험할 것 같다. 요즘엔 여유를 부려봐야 좋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다. 왠지 손이 떨린다.

“……다! 이번에도 앤슨 씨의 열렬한 팬께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번에 커뮤니티에 올린 글의 필명이 달라지셨죠?(전 그 질문을 받아보고 나서야 눈치 챘습니다만, 하하!) 앤슨 프레스(Prestissimo)라는 필명이셨죠.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름이셨습니다. 거기다 자주 소재로 쓰시던, 현대인들의 삶에 어울리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에 코모도(Comodo)로 필명을 바꾸셨습니다. 매우 빠르던 이름이 평온하게 바뀌었군요. 익명을 부탁하신 팬께서 이 변화에는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셈프레는 모두 지껄인 후 앤슨을 향해 돌아섰다. 빨리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소설을 쓴다는 마음가짐에 있어서나, 앞으로의 제 삶에 있어서나, 그것은 문자의 뜻 그대로의 변화를 보여줄 뿐입니다.”

“예! 앞으로 앤슨 씨가 소설가로서 어떤 글을 쓰실 지에 대한 파격적인 변신을 예고하는 것이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익명의 팬 분께서는 명확한 답을 얻으셨는지 모르겠군요. 게시판에 답변 부탁드리고요, 자!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아, 그 전에 제가 잠시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만, 괜찮을까요?”

나는 필명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잠시 중단시키고 글의 처음부분을 똑바로 살펴보니, Comodo라고 적혀있다.

다시 재생시키니 앤슨은 셈프레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셈프레는 과장되게 기뻐하며 그의 허락에 빠르게 응답했다.

“예, 앤슨 씨가 쓰신 이번 소설의 주인공에 관한 의문인데요. 저와 이름이 같아서 그럽니다만, 혹시…….”

셈프레는 제 딴에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태도를 취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봐도 입만은 빨라서 결국 그의 태도가 필요 없어졌다. 셈프레의 과도한 가속 후에는 자막만이 필요했다.

“그냥 쓰여 있는 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셈프레 씨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만은 알아두세요.”

셈프레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셈프레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바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나선다.

“예, 다음 질문입니다. 아마추어 비평가를 자청하는 회원분의 질문입니다. 엑셀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이 회원 분은…….”

“제 소설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냐는 질문이라면 받지 않겠습니다. 작가에게 자신의 글을 설명해달라고 하는 독자는 별로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겠습니까? 저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하도록 표현해내는 것까지만 작가가 발을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앞서 말씀드렸다 시피, 제가 소설을 쓰며 생각했던 내용을 독자 분들이 그대로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시계가 돌아가는 데 있어 느린 톱니바퀴는 필요 없지요. 혼자 느리게 돌아가니 빼버리겠죠.”

앤슨은 귀찮다는 듯이 셈프레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셈프레는 잠시 당황했다는 듯이 앤슨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예! 아마추어 비평가 엑셀 님, 안됐군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앤슨 씨가 확실히 예상해버리셨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그럼 다음, 마지막 질문입니다! 제작진이 앤슨 씨께 건넬 질문을 가지고 네 시간을 토의했었는데요, 어떻게든 결론이 나왔답니다! 하하. 자,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여태까지 쓴 단편들의 출판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내용이었다. 이제부턴 돈놀이에 대한 내용이라 별로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짧은 문답이 끝난 후 방송이 끝났고, 광고를 하기 전까지 노래가 흘러나왔다.

빠르기를 가장 숭배하는 래퍼의 노래였다. 평소 즐겨 듣던 노래였는데, 이번엔 듣기가 싫다. 그래도 듣게 된다. 난 어쩔 수 없이 빠른 자들을 숭배하는 신도이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앤슨의 소설에 비유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사람인 것 같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과거의 인간들이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알 수 있다. 일터와 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왕래하는 등 고통스러우면서도 느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이 시를 읊는 장면은 그 시작만 봐도 하품이 나와 종이를 재빠르게 넘기고 있는 나의 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독하게 여유로웠다. 사분음표 트란퀼로 같은 늙은이들. 아니, 그들이 여유롭다기보다는 우리들이 너무 바빠진 것일 거다. 내가 보기에 이 래퍼는 셈프레 같다. 미우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모순적 감정이 내 안에서 휘몰아친다. 이 래퍼와 셈프레는 누구보다 빠르기 위해 빠름만을 추구한 세상 속의 음표들과도 같았다.

앤슨의 말마따나 정말로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치도록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앤슨은 뒤늦게나마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려질 수는 없다. 번영을 포기하라는 것은 발정난 개한테 성행위를 관두게 하는 것처럼 위험하며 결코 실천할 수 없는 부질없는 떠벌임이다.

접속을 위한 단말기를 끄고 컴퓨터를 켰다. 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컴퓨터가 켜지며 음악이 들려오기까지 10초. 너무 느렸다. 신경질적인 욕설만이 입에서 나왔다. 선풍기의 풍속을 중에서 강으로 올린다.

마르카토 여사와 트란퀼로 씨를 섞어놓은 듯한 앤슨은 화면 속에서 멈춰있었고, 나는 그 화면을 꺼버렸다. TV속의 셈프레는 멈춰 보였지만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봤던 그 셈프레는 이미 밖으로 나와 소란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조화롭지 못한 혼합은 너무 불쾌했다. 앤슨과 셈프레에 그치지 않은 탁류는 이미 세상까지 퍼져 나왔다. 흐린 세상이 맑은 것처럼 느끼는 것은 나도 지식으로밖에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뜻일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세상은 맑게 보였다. 그것은 빛이 통하지 않는 먼지 속에서 헤매며 절규했지만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뭐하려고 빠르게 움직이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자문자답이 되어 미궁을 헤매는 우스꽝스런 염소가 되는 길이었다.

혼란 속에서 나는 내가 싫어하던 앤슨과 셈프레를 잘 갈아 섞은 음료가 되었다. 세상에서 반쯤 소화됐다. 뱃속에선 발효가 아닌 부패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비노 | 2009/08/26 21:37 | 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보물찾기

어떤 해. 8월 어느 날의 이야기.

 

 

저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고백하겠습니다. 저에 관한 사실입니다. 저는 몇십 시간 전에 제가 모르던 중요한 존재 하나를 눈치챘습니다. 항상 입에 담아가며 떠들던 그 말이었습니다만, 이렇게 알고 나서 혼자 뇌까릴 때의 그 느낌은, 그 존재가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지요. 아차, 뇌까렸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렇게 불쾌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이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군요. 그것은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반짝 드는 그 느낌을 미친 듯이 메모장에 적어가며 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을 때, 그것은 제 안에서 이미 흘러넘칠 것만 같았었습니다. 저라는 작은 인간쯤은 머리끝까지 담가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인류 모두를 품어낼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슬픔 속에서 확인해버린 그 감정은, 그 모두가 자기 혼자서 끌어안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중하게 속삭였습니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고 나서 돌아서며 그와 함께 대화하며 속으로 웅얼거렸습니다. 머릿속에 뿌옇게 본질이 자리 잡으려고 할 때, 그것은 너무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저에게 소중한 그것을 속삭일 때마다, 그것이 너무 진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그걸 혀로 계속 굴리고 있다는 것이 약간 부끄러워질 것도 같았습니다. 여태 그 감정은 욕망이라는 흐리멍덩한 범위 안에서 일축된 채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파묻혀진 그것을 파냈을 때, 소중함은 넘쳤습니다. 그래서인지 눈가가 약간 젖어 있었습니다. 유사 이래로 그것을 자신이 가졌음을 깨달은 현인들이 그것을 글로 표현한 것을 보고도, 저는 겉모습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화려하게 분칠 된 겉모습을 뚫고 속을 보았을 때, 그것이 너무 따듯했고 반짝였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너무 사랑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가장 소중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시작하는 감정입니다.

저는 잠시만 그것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졸며 라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말해도, 당신들은 제가 옛날에 했던 것처럼 겉모습만 겉돌 뿐일 테니까요. 그 소중한 감정을 말로 표현해봐야, 그 순수함이 변질하지 않은 채로 전해질 거로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아주세요. 그게 지식으로 남더라도, 그 지식은 소중함과 만나 풍요롭게 피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던 과거의 제가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른 채로 살아가는 당신을 지켜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의 겉모습이라도 아는 것은, 당신에게 더욱 큰 소중함을 안겨줄 등불이 되어줄 테니까요.

 

지금 저는 고등학생 3학년입니다. 공부란 것이 가장 중요할 때인데, 이런 감정을 논하고 있으니 당신들에게는 할 일을 마저 하지 않은 채로 낭만에만 빠진 청소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가 화려함에 빠져 그것을 광신하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너무 쓰라리니까요. 깨어난 감정이 가슴에 있고, 그 감정은 갈 곳을 잃은 채 저를 계속 찌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모르는 저를 상상하긴 싫습니다. 광신하더라도 알고 있기를 바랍니다. 저 자신만의 자폐적인 상념이라 해도 좋습니다. 잊는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입니다.

아, 제가 그와 그녀가 함께하고 있던 그 순간을 본 것은 얼마 전의 일입니다. 수능이 100일 남은 그 날입니다. 바로 그저께입니다. 예, 길거리에 술에 취한 채 걷는 청년들을 보았다면, 아마 그들은 저와 같은 3학년생일 것입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날의 일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전에, 제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잠시 서술 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이 감정을 말한 적이 없기에, 그 얘기를 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순간입니다. 1학년 때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쑥스러운 마음에 짝꿍과도 아무런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남자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한 대화를 할 뿐. 남자 중학교를 나와서인지, 여자와는 대화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순진한 소년의 시기였습니다. 환상 속에 헤어 나오지 못했고, 그 환상 때문에 여자들과는 벽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벽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 벽의 바깥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게 하나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벽의 가장 높은 부분은 항상 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요. 분홍빛이 쑥스럽게 물든 벽이었습니다. 제가 그 벽을 환상으로 칠했습니다. 하지만, 그 벽에는 창문이 없었습니다. 그 빛을 발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벽에 가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화려한 채로 저에게서 멀어진 채 보존되었고, 저에게 있어 여자들은 모두가 화려했고, 그렇기에 그들을 동경하는 저는 점점 더 자신을 더럽게 했습니다. 동경하기만 한 저는 여자들 모두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저를 더럽게 봤고, 그래서 저는 익숙한 남자들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들과만 어울렸고, 그 환상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성욕과 동경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서서는,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랑은 이미 욕망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남들이 사랑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열창하는 모습은, 동떨어진 이국의 풍경화 같았습니다. 동감할 수 없는 감정들 속에서, 그녀는 저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녀는 저의 자의에 의해 멀리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녀와 저를 가른 벽은 두꺼워졌습니다. 가끔 그 벽에 망치질해 보았습니다만, 건너편까지 소리가 전해지지도 않는 듯했습니다. 저의 힘이 부족했는지, 그 벽엔 금조차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명확해진 구분 선을 따라 겉돌았습니다. 저는 그 모든 욕망과 구분 지어진, 동성 간의 친분만을 찬양하였습니다. 욕망을 마약과도 같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맛본 저에게는, 마리화나처럼 삽시간의 행복을 줬었습니다. 순간 극도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눈송이가 됐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지나치고 나서는, 그것이 통념에 의해 받는 취급을 재차 깨달았었습니다. 이성의 손바닥에 닿아 삽시간에 녹아버린 아름다움 뒤에는, 자신만 만족하게 되어버렸다는 추악한 상념만이 남았었습니다. 그 추악함은 곧 욕망의 밀물에 침수되어 묻혔었고, 이내 쾌락 속에서 정자를 배출해낸 저의 뒷모습 속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욕망을 향해 침 뱉으며 다시 깨어났습니다. 그 반복 속에서 답을 찾아내지 못한 저는 결국 조울증과도 같은 환영과 거부가 수초 간격으로 반복되었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친구들과의 웃음만이 저의 붕괴를 막아주었습니다.

벽 너머에서 그녀는 경계선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욕망이란 늪 위에 있었는지, 동경이란 이름의 화려한 성 위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두 판단의 사이를 오가며 저를 혼란케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동경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저에게 발악을 요구했었습니다. 사랑은 욕망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녀는 동경의 대상임이 틀림없다는 자기최면적인 보루였습니다. 그 보루는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최후의 최후까지 몰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상태로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었습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밀려오던 의무의 물결은 어느새 파고가 높아졌습니다. 주변에서 불어대는 바람에 더욱 요동치는 그것은 재난영화의 해일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하게 변해 태양마저 가려버렸고, 제 이성이 안정을 복구하는 작업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붕괴시켰습니다. 그 거대한 벽에 작은 구멍이 뚫렸습니다. 벽 너머에서 시작해 밤하늘까지 하얗게 칠할 정도로 빛나는 그 존재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답답한 감정 속에서 벽 너머를 봤습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3년째 그녀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 하나만이 저에게 위안거리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녀와 제대로 대화한 적은 손에 꼽아봐야 슬플 것 같아 더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집이 가깝다는 것이 이리도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워 봐야 제가 가까이하질 못하니, 눈앞의 그녀를 바로 놓쳐버리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동경하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길 바랐습니다.

여러모로 고민거리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숨도 못 쉬도록 이미 저를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쳐 버렸습니다. 검게 칠해진 그 건물 속에서 제 손에 잡히는 것은 문제집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쌓인 불만은 욕설로 빠져나왔습니다. 난폭하다는 평은 저에게 있어 당연한 수식어가 되었습니다. 억눌린 감정들이 답답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치고받고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제가 날뛰는 도중에도 그녀가 절 보며 소소한 웃음이라도 지어주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교실 구석에서 바라보는 교실의 전경은 넓습니다. 평소 좁은 집에서 바라보던 정경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 넓은 공간 가운데, 그녀는 눈에 띄었습니다. 그녀가 그 모든 광경을 메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저께 일입니다. 그렇기에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여름의 잔인한 폭염 속에서, 저는 땀을 흘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휘몰아치는 의무의 격류는 저에게 피로만을 주었습니다. 저와 함께 귀가하던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집을 향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앞에는 그녀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욕정으로는 이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단지 동경일까요. 그때 처음으로 의심했습니다. 집이 가깝다는 사실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며 우연히 듣게 되었지만, 그때처럼 집에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같이 집에 갔다고 하기보단, 우연히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었겠지만 말이죠).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릴 것 같았습니다. 욕망은 일지 않았지만, 망상은 일었습니다. 어떤 오해를 받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손이 머리를 만집니다. 분명히 꼬여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만, 이리저리 다시 꼬았습니다. 당연히 머리는 더 꼬였고, 저는 그녀를 보지 않으며 머리를 계속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산만해진 정신은 1+1부터 다시 시작하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던 중, 잠시 이웃어른을 뵈게 되어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쭈는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시 인사를 하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는데, 그녀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가슴에 돌이 떨어진 걸까요. 심장이 멈췄을까요. 심장병이란 것은 이런 것을 말하던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좀 이상했습니다. 양 가슴이 동시에 답답해오는 것이, 뭔가를 바란다고 안쪽에서 소리치며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몰랐었습니다. 뭐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몰랐었습니다. 그냥 허탈한 마음에 그녀가 갔을 길을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2분쯤 신발 끈이 끊어지도록 쳐다보다가 앞을 봤더니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있었습니다. 오랜 친구는 아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즐거운 웃음을 준 친구입니다. 지금도 친구입니다. 어제도 친구였고, 고등학교 1학년 이래로 그와 저는 항상 친구이길 바랐습니다. 헌데, 왜 그가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일까요?

동경의 대상인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모습을 본 저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었습니다. 분노요? 아뇨, 그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다른 남자아이들과 잡담을 나누는 광경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분명히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었습니다.

그럼 뭘까요? 당시의 저는 몰랐었습니다. 남자가 등 뒤에 포장된 무언가를 숨긴 채 여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수줍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여자도 당황해서 여기저기 딴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저도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괜히 주변을 살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왔습니다.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다리에서 힘을 살짝만 풀어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어지러워졌습니다. 뜨겁게 빛을 내려 보내던 태양은 지구의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다리가 떨렸습니다. 그녀는 그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있지 않았습니다. 구겨진 옷깃 사이에 그늘이 짙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이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눈에 근접하게 흐른 땀은 또르르 굴러가다 땅을 향해 힘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눈앞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심장이 쿵쾅하고 뛰는 소리는 목과 팔과 머리를 타고 들렸습니다. 느껴졌습니다. 모든 게 떨리는 느낌에 한숨도 내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게 무거워진 느낌에 눈꺼풀을 드는 일조차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는 일은 포기했습니다. 그 당시엔 제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몰랐었습니다. 단지 그들을 지나치려 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하는 지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호흡조차 멈춰버릴 것 같았습니다. 잠시 그녀를 봤습니다. 점점 더 심장이 박차게 뛰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뛸까 했었습니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심장이 먼저 달아나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습니다. 구원을 바라듯이 조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지나가려던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눈치 채지 못했었습니다. 저 외에 움직이고 있을 사람은 없을 텐데, 옆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삽시간에 갖게 된 온갖 상상들을 떨쳐내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두 번 들렸습니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억지웃음이었습니다. 잠시만 더 그런 상태로 있었다면 울어버렸을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흔들던 손은 금방 멎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는 멍하니 있다가 저를 보고 쓰게 웃었습니다. 반가워하는 모습으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은 한 한숨의 주인공은 그였습니다. 그 이외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진 채 어설프게 웃었습니다. 저도 맞아 웃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표정을 찡그렸습니다.

“공부는 잘 되어가니?”

그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고등학생 3학년끼리 흔히 오가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제되던 의무는 당연한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황홀감에 젖어버렸습니다. 신과 부모님께 그토록 간단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손을 잡진 않았지만, 귀갓길을 함께하는 기분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나 할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곤 아까 느낀, 분노가 아닌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건 질투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깨닫고 난 후에 불어오는 뜨거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또 몰랐습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그것을, 벽을 둘러쳐 버린 제가 알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막막해진 느낌은 저에게 분노 또한 주었습니다.

셋이서 아무 말도 없이 걷기를 몇 분. 그러다가 그는 떠났습니다.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애정은 타인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그와 함께 떠났습니다. 저도 그에게 억지웃음을 지었고, 그녀는 그가 사라지자 다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대강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후, 다행이다. 고마워.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꽤 고마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꽤 큰 봉변이라도 당했을 것이라는 말투였습니다. 힘든 듯이 웃기에 잠시 가슴이 설렜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괜찮아. 그냥 지나가던 길인데, 뭐. 그나저나, D가 뭐라고 하던 거야?”

대충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얼굴에선 제가 거울을 볼 때 발견할 수 있었던 수줍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닮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나는 봄의 향기는 어찌할 수 없이 풍겼고, 저에겐 익숙한 냄새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맞췄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쓱하게 웃었습니다.

“아 맞다, 내일 시간표가 어떻게 되더라?”

그녀는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습니다. 화제를 전환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약간 말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얼굴을 보니 아직 붉었습니다. 이미 다 알았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난 ‘야다’의 ‘그대는 모를겁니다’라는 노래를 좋아해. 어째서인지 알아?”

평소 해본 적 없는 노래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사랑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감동한번 해본 적 없는 그 노래는 이미 저의 노래와 다름없었습니다. 머릿속을 흘러가는 가사가 저에게 눈물을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저의 말에 그녀는 모르겠다는 듯이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나의 그대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야. 작년까지는 나도 몰랐었지만, 이제 확실해진 내 감정을 그대는 모르고 있지. 이렇게 확실하게 보일 때까지 나는 상상조차 못했었어. 장담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녀가 질문을 하려 했지만, 제가 계속해서 말을 해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확실해. 동류는 서로를 알아본다지. D는 K,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건 너도 알 거야. 그가 등 뒤에 감추려 했던 선물상자를 너는 봤을 거야. 보지 못한 척을 했을 거야. 못 봤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가르쳐 줬으니 알게 되었을 거야. 있잖아. 사람들이 어째서 답을 요구하는지 알지? 과학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말이야. 질문에 맞는 답을 구하고, 그것에서 또 답을 구한거지.”

전 타이르듯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역시 그녀에겐 뜬금없을 뿐입니다. 사실 미칠 것 같은 것은 저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싶은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녀는 5분 전 그의 앞에 있었을 때보다 더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째서 사랑을 그토록 안쓰럽게 노래하는지 알아? 상대에게 그토록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노래하는 거지. 사람은 어떤 행동에 대한 응답을 바라기 마련이야. 상대가 답을 모른다면, 아는 상대를 찾거나, 내가 답을 내는 거지. 그가 상대를 사랑하는데 상대가 싫다고 말하면, 그것으로 답은 구해진 거지. 하지만 말이야…….”

잠시 쉬었습니다. 겁이 났었습니다. 6분 전 그가 하던 말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목이 타올랐습니다. 이마에서 흘러 눈을 거쳐 입으로 들어간 땀은, 낯설지 않았음에도 낯선 맛이었습니다. 눈물을 흉내 낸 땀 앞에서 눈물은 부끄러워 고개를 내밀지 못했었습니다. 분명 눈물은 처음으로 정체를 알아낸 감정을 보곤 당황하고 있었겠지요.

“D의 고백에 네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않을까. 그건 D에게만 잔인한 일이 아냐. 너도 불분명하게 뚝 끊어버린 사랑에 고심할 거야. 그렇게 불편하게 끊어져버린 관계는 친구로도 회복할 수 없지 않아? 이렇게 아픈 채로만 끝낼 수는 없잖아. 고민할 시간을 달라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거야. D는 기다려줄 수 있었을 거야. 네가 싫다면 싫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내면 돼. 좋다면 좋다고 말하면 돼. 적어도 너와 내가 알던 D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야.”

“그, 자, 잠깐만……. 난 갑자기 들어서, 좀 당황해서, 그러니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저는 MP3와 이어폰을 빌려주었습니다.

“너희 둘은 어울려. 분명 행복할 수 있겠지. 네가 싫다면 싫다 그래. D는 일주일 안에 실연의 상처 따윈 떨쳐낼 수 있겠지.”

그러면 슬퍼하는 너를 내가 만나러 가겠어. 저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커져버린 감정의 연료로 삼켜버렸습니다. 저는 간단히 단정지어버렸습니다. 책으로만 봤던 이야기를 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아직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떨 것 같이 어깨에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곧 울 것같이 추위에 떠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일단 남에게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저로부터 행복해야만 그 행복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이 어울린다는 말은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저는 가슴에서 흘러넘치려 하는 감정을 안고 도망쳤습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고민하며 걷고 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랑노래를 불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었지만, 그건 제 노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 들어갔습니다. 한 가지 사실이 너무 명확해진 나머지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들르면 일단 화장실부터 가겠다던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저녁을 먹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습니다. 넘쳐나는 감정의 색을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었기에, 허기짐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 뚜렷한 사실을 정리하고 싶었기에, 저는 메모장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낸 사실을 써내려갔습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흘러넘치는 이 감정을 늦게 알아차린 제가 미칠 정도로 미웠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손에 흐르는 땀을 닦지 않은 채 떨어뜨린 연필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를 알았다. 우울하지 않으면 이 슬픔이 어딜 향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슬픔이 어디에 호소할 수 있을까? 그들이 폭식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남의 감정이 고픈데, 어떤 것이라도 채워 넣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굶어죽을 듯이 슬픔만 나와 가슴을 쥐어짜는데. 당장 채울 방법이 없는데. 보통 먹는 걸로는 그 감정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을 것인데. 그들이 실어증에 걸리는 이유를 알겠다. 비어버린 심장에서 나오는 말은 슬픔뿐이기 때문이다. 슬픔만을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에 놀라 멈춘 심장이 다시 뛰기 전까지 슬픔을 자기 안에 가둬둘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남을 우울하게만 할 뿐이기 때문이고, 남이 말로 표현한 슬픔을 제대로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로 어찌하여 사람들이 감정을 노래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소중한 감정인데, 혼자 안고 있으면 흘러넘치는데, 자기 혼자만 감싸고 있으면 이렇게도 버거운데. 혼자 잡아두고 보내지 않으면 썩어 자신도 죽어버릴 텐데.

미친 듯이 써내리다가 손에 쥐가 나서 잠시 풀어줬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썼습니다.

-이 감정을 이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착각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픈데, 어느 누가 이것을 가장 따스한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남이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이렇게 요동치는 감정을 어찌 다스릴 수 있겠는가. 혼자 버티면 분명 삼켜져버릴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알아차리면 너무나도 포근한 것이다. 누구나가 노래한다. 그것을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감한다. 그들도 그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까? 너무 부끄럽다. 그래도 이제나마 알아서 다행이다.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몸을 사렸다. 지금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이 따스함이 저 냉기에 식어버리면 그만큼 냉혹한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딜 갔었느냐고요? 죄송합니다, 샤워 좀 하고 왔습니다. 물론 따듯한 물에 몸을 맡기기도 했었습니다. 몸 안에 있던 외로움이 위안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지금 씻느냐고요? 하긴, 좀 늦긴 했군요. 그래도 아직 밤은 덥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하다 보니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도 있어서 정리도 할 겸 씻었습니다.

아, 벌써 늦었네요. 슬슬 먼저 자러 가보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신 분. 감사드리고요, 다음 기회에 또 뵙길 바랍니다.

 

그렇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중요한 존재의 이름을 말입니다.

가슴에 항상 담아두고서도 벽으로 둘러쳐 욕망으로 불렀던 그 이름을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제 알아갑니다. 저와 당신을 모두 품어내는 따듯함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 소중한 경험은 노래를 부르며 영원히 제 속에 각인시킬 것입니다. 뼈에 새긴 감정을 또다시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먼저 알아갈 것입니다. 경험하지 않아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미 벽은 없으니, 내일 학교에서 그녀에게 인사라도 건네야겠네요.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비노 | 2009/08/16 14:46 | 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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